제16회 밴 클라이번 우승자, 임윤찬의 결선 곡

국제 콩쿠르에서 대회 사상 최연소로 3관왕을 차지해 전 세계를 뜨겁게 달군 피아니스트 임윤찬(18). 그가 결선에서 연주한 곡 중 하나는 악성(樂聖)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이다. 베토벤이 청력 상실이라는 좌절을 딛고 자신의 심오한 작품 세계로 몰입하게 된, 전환점이 된 작품이다.

 

제16회 밴 클라이번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한 임윤찬의 피아노 연주 장면.

 

지난 2015년,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제17회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International Frederick Chopin Piano Competition)에서 1위를 차지하며 세계 클래식계의 판도를 뒤흔들었다. 그로부터 7년 후인 2022년, 또 한 번 국제 무대에서 우리나라의 위상을 드높인 신성이 등장했다. 만 18세의 임윤찬이 북미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제16회 밴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The Van Cliburn International Piano Competition)에서 우승은 물론 청중상, 비벌리 테일러 스미스 특별상까지 받으면서 3관왕을 차지한 것. 이번 기록은 역대 최연소 수상이라는 점에서, 어린 나이임에도 세계적 거장과도 같은 작품 해석력, 테크닉, 표현력의 완벽한 합을 선보였다는 점에서 전 세계 클래식 애 호가의 가슴을 벅차게 했다.

밴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의 결선에서는 주최 측에서 지정한 작품중 두 곡을 선택해 포트 워스 심포니 오케스트라(Fort Worth Symphony Orchestra)와 협연하게 된다. 지금 소개하는 작품은 바로 피아니스 트 임윤찬이 결선에서 연주한 곡 중 하나로, 베토벤의 유일한 단조 협주곡이자 자신의 음악적 색깔과 표현을 확장한 시작점에 있다고 평가받는 곡이다. 임윤찬이 지난 2019년 윤이상 국제 음악 콩쿠르 (Isangyun Competition) 피아노 부문에서 대회 역사상 최연소로 우승했을 때 연주한 곡이기도 하다. 국제 무대에서 가장 잘 연주할 수 있는 곡이 무엇일지 고민하다가 선택했다고 알려진 작품.

그렇다면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의 <피아노 협주곡 3번(Piano Concerto No.3 in c minor, op.37)>에는 어떤 비 하인드 스토리가 숨어 있을까.

 

20대에 찾아온 귓병, 깊은 우울감에 쓴 유서

독일 본(Bonn) 태생인 베토벤은 스물두 살이 되던 해인 1792년, 음악가로서 성공하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오스트리아 빈(Wien)으로 향했다. 당시 빈은 음악가들에게 오스트리아의 수도 그 이상의 의미였다. 교회음악이 발달한 쾰른(Köln), 오페라를 주름잡고 있는 프라하 (Praha)처럼 각 지역을 대표하는 음악 장르가 있다면, 빈은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토털 패키지’였다. 음악가로 명성을 떨치려면 ‘유럽 전역의 음악가가 모이는 음악의 수도’ 빈에서 인지도를 얻어야 했다. 음악가들은 궁정에 소속되어 활동하거나 부유한 귀족들의 후원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빈에서 인지도만 쌓는다면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 술주정뱅이 아버지 밑에서 힘겹게 자랐고, 가장 역할까지 도맡아야 했던 베토벤에게 본업 성공은 커리어와 직결되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듯 베토벤은 젊은 나이에 청력을 상실했다. 정신질환, 폐질환 등 심각한 병을 여러 차례 앓았지만, 그중에서 귓병은 음악가에게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1802년에 쓴 ‘하일리겐슈타트(Heiligenstadt)의 유서’에 따르면 베토벤은 20대 중반인 1796년 무렵 청력에 이상이 생겼다. 이 시기는 그가 빈에서 활동한 지 10년 째 되는 해였고, 빈의 사교계에서 전문 연주자 겸 음악 교사로 이름을 날리고 있을 때였다. 바쁜 도심에서 지내던 그가 갑자기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교외로 옮겼다는 사실은 새로운 변화와 마음가짐이 필요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베토벤이 30대에 유서를 쓴 이유도 귓병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컸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유서에는 6년 전 부터 병을 앓아왔으며 오랜 시간 의사에게 진료를 받아왔지만 소용이 없다는 절망감이 가득했다. 병을 열심히 숨겼지만 주변 사람들도 알게 된 것 같고, 더 많은 사람이 알게 되어 음악가로서 생명이 끝날 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담겨 있었다. 사망 후 재산상속에 대한 언급까 지 있었으니 명백한 유서였다. 귓병은 한 작곡가를 우울감에 빠뜨리기에 충분한 사유였다.

 

완성 무렵인 1803년 당시의 베토벤을 그린 초상화.

 

절망을 닫고 찾아온 음악적 변화와 창작 욕구

음악사에서는 이 유서를 기점으로 베토벤의 작품에 급격한 변화가 찾아왔다고 보고 있다. 이전까지 당대에 활동하던 하이든(Franz Joseph Haydn, 1732~1809),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의 음악 스타일을 배우고 있었다면 이후에는 그가 본격적으로 자신의 색깔을 찾아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피아노 협주곡 3번>(1796~1803)은 정확히 이 교차점에 있던 시 기에 구상한 작품으로 꼽힌다. 이후에 작곡한 <피아노 소나타 23번 ‘열정’>(1804~1805), <교향곡 제3번 ‘영웅’>(1804), <교향곡 제6번 ‘전원’>(1808) 등과 비교해 보면 그의 변화를 더 확연히 느낄 수 있 다. 우울한 심경을 뒤로하고 빈으로 돌아온 베토벤. 철저하게 귀족과 상류층의 기호와 목적에 맞게 쓰던 작품 경향에서 벗어나 프리랜스 음악가로서 한 단계 더 깊이, 심오하게 자신의 철학과 사고를 작품 안에 담아내기 위해 집중했다.

<피아노 협주곡 3번>은 베토벤이 33세가 되던 1803년 4월 5일, 오스트리아 빈에 위치한 안 데어 빈 극장(Theater an der Wien)에서 초연되었다. 슬럼프를 딛고 일어나서 쓴 작품인 만큼, 베토벤 스스로도 협주곡 1번, 2번보다 훨씬 마음에 들어했다. 초연 때 베토벤이 직접 피아노를 연주했는데, 작품에 들어 있는 카덴차(cadenza, 연주자가 자신의 기량을 뽐내기 위해 화려한 연주를 즉흥적으로 선보이는 구간)를 완벽하게 구사해 연주자로서 남다른 면모와 기량을 선보이기도 했다.

 

비르투오소, 뛰어난 피아니스트로서의 베토벤

많은 사람이 작곡가 베토벤은 잘 알지만 연주자 베토벤은 생소하게 느낄 수 있다. 베토벤은 당대 최고의 ‘비르투오소(virtuoso, 뛰어난 연주 테크닉을 가진 음악가)’ 피아니스트였다.

하일리겐슈타트 유서의 첫 장. 음악가로서 치명적인 귓병을 앓았던 베토벤은 당시 우울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18세기의 피아노는 ‘악기의 왕’으로 군림할 정도로 많은 대중과 음악가들에게 사랑받았다. 부유한 집안에 피아노 한 대씩은 꼭 있었고, 이는 곧 교양의 척도였다. 특히 베토벤이 빈에 도착했을 당시 이미 300여 명의 피아니스트가 빈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피아노를 배우는 사람도 6000명이 넘을 정도였다. 피아노는 다른 악기에 비해 표현할 수 있는 음역대가 넓었고, 소리의 강약 조절도 수월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는 혁명과도 같았다. 피아노는 18세기 전반에 걸쳐 꾸준히 개량되는데, 베토벤은 피아노가 가진 다이내믹한 표현력을 개발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받는다. 베토벤은 연주 실력은 물론이고 힘까지 좋았던 터라 그가 화음을 치며 연주할 때 줄이 끊어지는 일이 잦았다. 빈에서 가장 많은 피아노를 망가뜨린 연주자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정도였다. 베토벤의 제자 카를 체르니(Carl Czerny, 1791~1857)는 ‘베토벤에게는 지금보다 더 좋은 피아노가 필요하다’ 며 주변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기도 했다.

피아노의 인기는 곧 음악가들의 즉흥연주 대결로 이어졌다. 이는 음악가의 실력과 직결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더없이 좋은 수단이었다. 베토벤은 신인 작곡가이자 실력 좋은 피아노 선생, 그리고 즉흥연주의 달인으로 사교계에 이름을 떨치게 된다. 베토벤 의 연주에 대한 당대 음악가들의 소감이 이를 증언한다.

 

“베토벤의 자유롭고 환상적인 연주를 못 들어본 사람은 이 천재가 가진 깊이를

불완전하게 알 뿐이다.”

_트레몽(Baron de Trémont, 1779~1852)

나는 최고로 위대한 어떤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들었다.

 

(중략) 그는 기술만이 아니라 아이디어의 명료함, 심오함, 표현력에서 매우 뛰어났다.”

_융커(C. L. Junker, 1748~1797)

 

베토벤이 즉흥연주 대결을 하는 모습은 보통 검투사의 경기, 야수들의 싸움으로 묘사되는데, 항상 청중을 압도했다는 수사가 붙었다. 일부 학자들은 베토벤이 여러 음악가를 제치고 빈에서 빠르게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즉흥연주를 꼽기도 한다. <피아노 협주곡 3번>의 즉흥연주 구간, 카덴차를 베토벤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연주했을지 상상해 보라! 완벽주의의 예민한 성격 탓에 이 작품을 초연하기 전 무려 7시간 동안 리허설을 했다고 하니, 그 연주가 어떠했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늘 메모하고, 자주 편지를 쓰던 세심한 완벽주의자

베토벤의 이런 성향은 작곡에서도 잘 드러난다. 베토벤은 이 작품을 1800년 4월 2일에 초연하려 했지만 즉흥연주가 필요한 이 부분을 굉장히 오래 고민했다. 초연 일정이 한참이나 미루어졌음에도 마지막까지 작곡이 마무리되지 않아 현장에서 즉흥으로 연주를 마쳤다. 정식 악보 출판도 초연 이후에 이루어졌다.

하지만 아무리 즉흥연주이더라도 베토벤은 절대 가볍게 지나치는 일이 없었다. 그는 현장에서 즉흥연주 요청이 들어오면 양손에 항상 갖고 다니던 노트와 연필로 악상을 그려보고 연주를 시작하곤 했다. 메모는 그의 오랜 습관이었다. 홀로 산책을 즐기며, 사색에 잠기는 것이 취미였던 베토벤은 번뜩 떠오르는 아이디어나 악상을 스케치로 옮겼다. 베토벤이 스케치한 악보들을 보면 여러 차례 썼다 지웠다 한 흔적이 있다. 그만큼 고심을 거듭했고 음표 하나도 절대 허투루 넣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다. 다만 악필이었기 때문에 악보인지, 낙서인지 제대로 알아보기 힘든 부분도 있긴 하다. 누군가에게 편지도 자주 썼다. 현재까지 1600여 편의 편지가 발견되었는데, 꽤 많은 사료 덕분에 당시 베토벤의 일상과 생각을 엿볼 수 있게 되었다.

 

의 표지. 베토벤이 단조로 작곡한 유일한 피아노 협주곡이다. 
의 표지. 베토벤이 단조로 작곡한 유일한 피아노 협주곡이다. 
 1악장의 카덴차 부분이다. 즉흥연주 구간인데, 베토벤은 오랫동안 이 부분을 고민했다.
 1악장의 카덴차 부분이다. 즉흥연주 구간인데, 베토벤은 오랫동안 이 부분을 고민했다.

 

단조로 작곡된 베토벤의 유일한 피아노 협주곡

베토벤은 1800년경부터 10여 년에 걸쳐 총 다섯 곡의 피아노 협주곡을 남겼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 시기는 베토벤이 귓병으로 상실감에 시달리던 때이자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우울감에 사로잡혀 유서를 남긴 때다. 하지만 상처를 딛고 일어나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해 여러 명작들을 쏟아내던, 베토벤의 전성기이기도 하다. 따라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은 당시 베토벤이 처했던 정서적 상황을 토대로, 작품 철학과 변화 과정을 잘 드러내는 장르라고도 할 수 있다. 그중 <피아노 협주곡 3번>이 조금 더 특별한 이유는 ‘조성(key)’ 에 있다. 피아노 협주곡 중에서 유일하게 단조(minor)로 작곡한 데다가 베토벤이 자주 사용했던 C단조 조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 서 자주 사용했다는 것은 가장 많이 사용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C단 조 조성을 가진 그의 작품들은 영웅적인 웅장한 음색, 묵직한 힘, 격정적이면서도 감성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그 자체로도 독창적이고 아름다워 특히 주목할 만하다. 대표적인 예로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1799), <교향곡 제5번 ‘운명’>(1808)만 떠올려도 금세 공감하게 된다. <피아노 협주곡 3번>도 이와 비슷한 색깔을 갖고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임윤찬의 연주는 작품의 핵심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관통한 것으로 극찬받았다.
임윤찬의 연주는 작품의 핵심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관통한 것으로 극찬받았다.

 

18세의 임윤찬, 33세 성인(聖人)과 조우하다

이런 이유로 연주자 입장에서는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을 해석할 때 더욱 심오한 고민에 빠지고 무거운 부담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임윤찬의 연주가 극찬받은 이유는 기본적으로 작품의 핵심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관통하기 때문이다. 이 곡의 창작 시기는 이전 세대 작곡가들의 음악 스타일과 베토벤 자신의 스타일이 결합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정석대로 음표 하나하나 정확하게 연주하는 청아함도 필요하지만, 베토벤의 입장에서 작품을 해석한 표현력이 요구될 수밖에 없다. 임윤찬은 악보에 적혀 있는 내용에 더해 연주자로서 표현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면서 오케스트라와의 호흡을 놓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청중을 사로잡았다. 그가 연주한 작품의 전체적인 큰 그림을 보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베토벤의 웅장한 스타일과는 다른, 새로운 해석이다. 특히 1악장 후반부에 등장하는 카덴차! 88개의 건반으로 오케스트라처럼 풍성한 사운드를 내다가도 피아니시모의 트릴 연주로 마무리함으로써 피아노가 가진 표현의 한계가 어디까지일지 탄성을 자아낸다. 임윤찬에 보여준 피아노 연주의 특징은 일일이 나열하기 벅찰 만큼 무수히 많고 그만큼 다양한 감상이 쏟아지고 있다. 연주자들은 악보를 마주할 때면 여러 고민을 한다고 한다. 어떻게 하면 창작자가 작품을 썼을 당시의 상황과 감정을 잘 이해할 수 있을지,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해석하고 표현하면 좋을지, 이런 생각이 깊어 지면 ‘감히 내가 이 작품을 연주해도 될까?’ 하고 고뇌하는 지점에 이른다는 것이다. 악보의 이면까지도 해석해 내야하는 연주자의 역할이자 숙명일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베토벤의 작품은 작곡가의 철학과 사고가 더 많이, 더 깊이 투영되어 연주자로서 어려워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즐기는 사람이 가장 아름답다고 하지 않던가. 임윤 찬이 우승 소감으로 “달라진 것은 없다. 우승했다고 내 실력이 느는 건 아니다”라고 밝혔듯, 그저 음악에 몰두하다 보면 어느 순간 한 시대의 위대한 성인(聖人)과 조우하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저 연주자들의 작품을 즐기고, 응원하고,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김주형(하루예술 소속 작가) 이미지 출처 밴 클라이번 콩쿠르 공식 홈페이지,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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