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용의 리더십 에세이 ①

세상이 점점 무표정으로 바뀌고 있다. 무표정만 되도 참을만 한데, 무서운 표정이 곳곳에서 넘실댄다. 그러니 우리는 말이다, 생선이나 낙엽이나 동물처럼 표정으로 표현을 하자는 거다. 사람들의 표정이 밝고 맑고 아름답고 선할 때 세상 역시 밝고 맑고 아름답고 선해질 테니까.

 

내가 일하는 장소 바로 뒤편에는 조계종 사찰인 ‘자비사’가 있다. 1년 전쯤 새로 부임한 주지 스님은 절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하시다. “이 절은 천년 고찰입니다. 중국 사신과 상인들이 일을 마치고 대륙으로 넘어갈 때 무사귀환을 빌던 곳이기도 하지요! 의전 차원에서 왕이 이곳까지 왔다는 설도 있어요!”

천년고찰이라는 말에 적잖이 놀랐다. 주지 스님의 얼굴은 천년의 미소처럼 빛이 났다.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스님의 표정은 예술이구나. 어쩌면 저렇게 편하고 차분하고 안정적일까. 마치 숙취로 인해 속이 불편할 때 엄마가 끓여준 죽 한 그릇에 스님의 표정이 담겨있는 것 같아. 선한 마음, 아름다운 마음, 맑은 마음을 가지면 표정도 저렇게 선하고, 아름답고, 맑게 될 수 있는 걸까?’

사람의 얼굴은 자의든 타의든 그림을 그리기 마련이다. 희로애락의 온갖 삶들은 얼굴의 표정으로 옮겨져 밖으로 드러난다. 울거나 웃거나 찌푸리거나, 얼굴이 그려낸 그림들은 결국 자신의 작품이 된다. 그 작품은 전시장에 걸려있는 그림처럼 고스란히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고 전해진다.

스마트폰 카메라가 일반화되면서 사람들은 자주 셀카를 찍는다. 장난으로 찍거나 SNS 프로필 사진용으로 찍거나, 예외 없이 멋지고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 다양한 표정을 지으며 얼굴의 그림을 그려본다.

나 역시 자주 거울을 보면서 웃는 모습을 취하곤 한다. 셀카를 찍어도 가장 멋진 모습을 만들기 위해서다. 얼굴의 곳곳에 주름이 깊어졌지만 멋진 그림을 포기할 수 없다.

 

자존감을 눈으로 표현

취미 삼아 그림을 그린다. 그리기 연륜이 꽤 된다. 하지만 작품이라고 남들 앞에 자신 있게 내놓을 만한 수준이 못된다. 그리는 것이 좋아서 하는 일이다.

그리는 것을 통해 몰입의 희열을 느낄 수 있다. 순수 아마추어 그림 작가 – 라고 하기엔 몹시 부끄럽지만, 남들이 그렇게 불러주니 – 일 뿐이다.

순수함만 마음 가득 담고 있는, 함께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끼리 십시일반 갹출하여 전시회를 열기도 한다. 내 작품의 관객은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들이 전부이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을 보면 나는 놀랄 수밖에 없다. 모두가 동시에 눈과 입이 커지는 놀람과 ‘네가 해냈구나’라고 여기는 듯한 탄성 때문이다.

그야말로 그림 작품을 보는 그들은 하나 같이 아름다운 얼굴 표정들이다. 어쩌면 저런 얼굴 그림을 그려낼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그들의 얼굴을 보면 의식적이지도 않는다. 마음이 보내는 강제성도 없어 보인다. 그냥 좋은 거다. 어떻게 아냐면, 그 얼굴 표정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과거 직장인 시절 때 있었던 일이다. 부서원과 점심식사를 하러 근처 생선구이집에 갔다. 주문한 생선구이가 먹음직스럽게 잘 구워져 나왔다. 생선 대가리 부분까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불에 구워진 흔적들이 여기저기 드러나 있다. 구워진 생선의 하얀 눈알, 작지만 크게 벌린 입, 그리고 생선의 등 부분의 검은 점들까지 전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동석한 동료에게 말했다. “생선은 표정으로 말을 해요.” 동료는 눈을 휘둥그레 치켜뜨며 믿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말을 이었다. “생선은 소리를 내지 못하지만 표정으로 말은 한 대두요?” “진짜요? 정말로 그럽니까?” 단어의 반복은 정말 믿지 못하겠다는 거다. “그래요. 표정으로 말은 한다니까요?”

재차 강조하자 동료가 물었다. “그럼 이 생선은 지금 뭐라고 말을 하고 있나요?” 나는 그를 보며 자신 있게 말했다. “살려주세요!”라고…. 크게 웃기 시작하던 동료가 말을 보탰다. “제발, 살려주세요! 라고 했군요.”

우리 집에는 가족의 일원으로 2살짜리 강아지가 있다. 반려견 1000만 시대라고 한다. 우리 집 그 아이는 ‘루체’라는 자기 이름을 갖고 있다. “루체!”라고 부르면 소리 나는 쪽으로 얼굴을 돌린다.

루체에게는 그만의 표정이 있다. 그런데 그 표정으로 전달되는 메시지가 기가 막히다. 정말 신비로울 정도다. 표정의 원천은 바로 루체의 눈(目)이다. 눈으로 무어든 하고 싶은 말들을 전해 준다.

보통 때 루체의 눈은 그저 평화롭기만 하다. 사람이 멍을 때리는 것과 같다. 화가 날 때는 그의 눈은 매우 표독스럽게 바뀐다. 가족들이 옷을 챙겨 입고 외출 준비를 할 때면 두 눈은 슬퍼진다. 이 때 루체와 눈이 마주치면 가족들의 마음도 몹시 짠해진다.

간식 같은 먹을 것을 줄 때는 즐거운 기쁨이 가득 찬 눈이 되어 금방 튀어나올 지경에 이른다. 가끔 자동차 조수석에서 아내 품에 안겨 드라이브를 할 때는 호기심이 가득 차 있는 눈이 된다. 호기심 천국 루체는 연신 전후좌우로 눈을 돌려가며 세상을 읽는다.

루체는 그의 자존감을 눈으로 표현한다. 집사의 사랑을 받으면 뿌듯함이 둥근 눈 속에 가득 들어있다. 사람 식으로 해석하면 ‘나는 이대 나온 여자야!’ 정도쯤 될까? 퇴근해서 현관을 들어서면 루체는 집사 앞에서 뱅뱅뱅 돈다. 이 같은 행동은 ‘껴안아 달라’는 메시지이다. 눈을 통해 전달되는 다양한 표정은 그야말로 사람으로 치면 말(言)과 같다. 동물의 표정이 소통과 교류와 공감의 역할을 하는 격이다.

 

누구든 쪽팔리지 않게 살았으면

주말에 가을을 느끼기 위해 서울숲을 찾았다. 가을의 상징은 역시 만산홍엽 짙어가는 단풍이다. 집 밖 멀리까지 나가지 못해 찾은 곳이다. 서울숲은 가을이 오면 낙엽과 깊은 인연을 맺을 수 있는, 오래전에 이미 서울의 명소가 됐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은 이유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 이유는 바로, 낙엽들의 표정에 있을 것이다. 아름다운 색깔의 옷으로 갈아입고, 청춘 같았던 푸름을 털어낸 잎사귀에는 이제 건조함이 가득한 주름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가을은 쓸쓸하다는 낙엽들의 외침이다. 더불어 인생의 황혼을 대입시켜주는 효과까지 낙엽은 갖고 있다.

인생의 가을 같은, 낙엽의 부가가치를 알아주는 곳이 있다. 바로 남이섬이다. 남이섬은 가을이면 낙엽을 구한다. 인생의 가을 정서를 느껴보려는 사람을 위하여….

춘천에 있는 남이섬은 서울 보다 낙엽이 빨리 진다. 남이섬의 상상유발자요 세상 창작자인 강우현 대표는 송파구의 관내 가로수들이 떨어트린 은행잎 10여 톤을 모아 남이섬 은행나무길에 뿌리는 창의성을 발휘했다.

비로소 은행나무에서 떨어진 낙엽은 수많은 사람의 발길로 사랑을 받게 된다. 사람들은 또 어떤가! 송파에서 배를 타고 입도한 낙엽들의 앳된 희생으로 가을을 느끼고, 더해 인생의 한 골짜기에 가을의 추억을 쌓는다. 낙엽의 표정들이 더 환해지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소설 <마지막 잎새>도 결국 나뭇잎의 표정으로 승부를 건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는가!

한때 나는 좋은 기사만 들어있는 뉴스 매체를 만들고 싶었다. ‘지구가 멸망한다는 소식이 들려도 좋은 뉴스(good news)만 싣는다’는 사명서까지 만들었다.

세상이 점점 무표정으로 바뀌고 있다. 무표정만 되도 참을만 한데, 무서운 표정이 곳곳에서 넘실댄다. 그러니 우리는 말이다, 생선이나 낙엽이나 동물처럼 표정으로 표현을 하자는 거다. 사람들의 표정이 밝고 맑고 아름답고 선할 때 세상 역시 밝고 맑고 아름답고 선해질 테니까. 온 세상의 것들은 표정이 없는 것이 없다. 표정의 차이만 있다. 이왕이면 셀카를 찍는 표정으로 세상을 살아가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예전에 읽었던 남이섬 강우현 대표의 가훈이 생각난다. “너 강우현의 아들로서 아버지 쪽팔리게 하지 않고, 나 강준수의 아버지로서 너 쪽팔리게 안 할게.” 지금까지 가훈이 유효한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는 사람이니 누구든 쪽팔리지 않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김성용 현대오일뱅크 전 홍보팀장, 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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