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에 있는 조이(Joy)와 현관문을 두발로 서서 긁고 있는 베리(Bary)가 컹컹 짖었다. 권소연 노메디카 디자인 연구소 대표가 조이를 진정시키고 주택을 개조한 연구소 2층으로 안내했다. 사나워 보였던 베리는 어느새 2층에 따라 올라와 권소연 대표의 사무실로 총총히 들어갔다. 벽에 걸린 수많은 사진 중 그와 똑 닮은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미모였구나 싶다.

 

사람을 만날 때 선입견은 금물이라지만 고백해야겠다. 자기 몸보다 큰 대형견 조이의 목줄을 잡고 거침없이 제압하는 모습에서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는 선한 눈매에 깨끗한 피부, 단정한 옷차림과 반듯한 자세, 차분하고 군더더기 없는 말투 탓(?)에 여자친구들보다는 남자친구들이 많은 내숭과 여자일 줄 알았다. 게다가 그는 토요일 아침부터 드라이가 잘 된 헤어와 살구색 블라우스, 에이치라인(H-line) 스커트에 아찔할 킬힐까지 갖춰 신은, 그야말로 풀세팅을 마치고 리무진에서 막 내린 새색시 같았다!

그런데 이거 보통 반전이 아니다. 점심은 칼칼한 꽁치김치찌개로 하자며 신사동의 유명한 닭발집은 다음 기회로 기약한다. 예쁜 사람이 소위 하드코어(Hard-Core) 음식을 먹을 때 놀랍고 의외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권 대표는 그런 식상한 반전만 있는 게 아니었다. 할 말은 반드시 하고 넘어가야 하는 강단과 부족한 점은 바로 수긍하고 배우려는 자세, 욱하면 도면도 던져버리는 터프함에서 점심식사는 직접 요리해서 직원들과 함께 먹는 다정함까지, 이 사람 정말 매력 있다.

저희 어머니를 본 클라이언트들은 모두 어머니에게 반하셔서 되레 저에게 어머니 칭찬을 들려주세요. 어머니가 저와 직원들을 대하는 모습에서 이 분의 따듯한 마음을 느끼시는 것 같아요. 이런 좋은 분을 어머니로 둔 사람이라면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고요. 저는 여러 가지로 어머니 덕을 참 많이 보고 있어요.

엄마는 가장 소중한 인플루언서

“노메디카 디자인연구소의 클라이언트는 개인 고객도 많지만 현대건설, 대우 푸르지오, 대림산업 등 건설사 위주라 남자 고객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성 CEO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어요. 흔히 하는 저녁 접대보다는 제가 손수 만든 점심식사를 대접합니다. 고객님들은 사무실로 초대받았다는 것에 한번 놀라시고, 제가 요리를 한다는 사실에 두 번 놀라시더니 제 요리솜씨에 한 번 더 놀라워하십니다.”

한식, 중식, 칵테일 자격증에 이웃사촌이었던 하선정 요리연구가와 함께 요리를 즐겼을 정도로 요리 내공이 강한 어머니를 둔 덕이다. 어머니를 유난히 따랐던 막내딸은 어려서부터 쭈그리고 앉아 배추를 다듬고, 고구마 줄기를 떼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었단다. 어머니 또한 이 셋째 딸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권 대표가 있는 노메디카 디자인연구소의 감사직을 맡고 있는 어머니는 매일 아침 연구소의 마당을 쓸고, 조이의 똥을 치우고, 직원들에게 점심밥을 만들어 먹인다. 호칭만 감사일뿐이지 13명의 노메디카 식구들을 자식으로 둔 만인의 어머니다.

“저희 어머니를 본 클라이언트들은 모두 어머니에게 반하셔서 되레 저에게 어머니 칭찬을 들려주세요. 어머니가 저와 직원들을 대하는 모습에서 이 분의 따듯한 마음을 느끼시는 것 같아요. 이런 좋은 분을 어머니로 둔 사람이라면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고요. 저는 여러 가지로 어머니 덕을 참 많이 보고 있어요.”

실제로 그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은 어머니다.

“어머니는 직원들의 표정이나 손짓만 봐도 마음을 읽을 줄 아세요. 그래서 제가 직원들을 대하고 격려하는 데에 어머니의 조언이 큰 도움이 됩니다. 직원들을 뽑을 때에도 어머니의 역할이 커요. 제가 1차와 2차 면접을 보면 어머니와 임원 분들께서 최종 면접을 맡아주시는데, 어머니는 제가 보기엔 전혀 상관이 없을 것 같은 질문을 면접자에게 던지죠. 이를테면 ‘아버님이 일요일에 늦게 오셨는데 어머니가 아버지께 심부름을 부탁한 상황에서 아버지는 피곤해서 이를 피하고 어머니는 계속 아버지께 다녀오라고 말한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식이에요. 그런 엉뚱한 질문을 받았을 때 면접자의 표정과 답변을 눈여겨보시고 평가하신대요. 그런데 신기한 것은 어머니가 뽑은 사람들이 언제나 근면 성실하게 오래 일한다는 거예요.”

면접자들의 행동유형을 살펴서 앞으로 일어날 유사한 상황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알아보는 이러한 면접 방식은 이미 외국계 기업에서 널리 적용되고 있는 시스템이다. 어머니가 예로 든 상황이 생뚱맞아 보일지라도 이는 면접자를 심층 분석하기에 매우 과학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이다.

 

엄마는 나의 ‘미래’

“어머니는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갖고 계신 분이에요. 제가 불의를 보면 지나치지 못해 욱하는 성격인데 반해 어머니는 잘못된 것을 보더라도 비유를 들어 완곡하게 말씀하시죠. 상대방이 상처받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에요. 본인이 스스로 깨닫고 뉘우칠 수 있게 기다려 주세요.”

한번은 다이어트를 하는 직원이 점심을 계속 거르자 어머니는 건강을 해칠까 염려스러우셨는지 그에게 기아로 굶주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린 기사를 가져와 보여주셨다.

“뭐든지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는 제 성격을 누구보다 훤히 꿰뚫고 계시기 때문에 어머니는 제게 적어도 세 번은 참고 생각해보라 이야기하세요. 그래서 노력하는 편인데 제가 제일 참을 수 없는 부분은 디자인 비용(Design Fee)을 인정해 주지 않을 때입니다. 시공에 당선이 되면 엄연히 가치를 인정받아야 할 디자인을 시공비에서 남기라고 하시죠. 디자인 비용은 따로 인정해 주지 않겠다는 겁니다. 저는 디자인을 인정해 줄 수 없다면 시공일도 맡을 수 없다는 말씀을 드리고 서류를 다 챙겨서 나와버려요. 마음을 돌리려는 리액션이 아니에요. 노메디카 디자인을 인정해 주지 않는 이들과는 다른 일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죠.”

이런 그의 고집이 국내 건축 디자인의 자존심을 지키는 데 일조했다. 일례로 故 앙드레 김 디자이너와 빌라 오르뷔제를 진행할 때, 그는 심오한 연출과 기획으로 앙드레 김의 예술성을 최우선으로 살리는 데 집중했다. 앙드레 김의 예술적인 모티브를 빌라 외관과 내부의 설계요소에 적절히 조화시켜 패션과 문화를 주거공간에 반영한 것이다.

외국에서는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들이 주택 실내 디자인에 참여하는 것이 일종의 트렌드가 됐지만 국내에서는 처음 있는 시도였다. 그는 3년 내내 앙드레 김의 작업실에 드나들며 이 프로젝트에 매달렸다. 한번 시작한 프로젝트는 빨리 끝내면 끝낼수록 이익인 이 업계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하고 싶은 일은 꼭 해내고야 마는 근성과 여유, 어머니로부터 배운듯하다.

“현장에서 일하는 일용 근로자분들이 계시잖아요. 제 입장에서는 그분들이 저녁이 되기 전에 최대한 빨리, 많은 일을 해주길 바랄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어머니는 그분들을 위해 점심을 한가득 싸 들고 찾아오십니다. 보쌈에 족발에 갖은 반찬까지, 한 상 차림을 현장에 펼쳐놓으시고는 1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점심을 대접하세요. 정작 딸인 저는 1분 1초가 급하고 초조해서 밥도 잘 안 넘어가는데 말이죠. 어머니는 고생하시는 분들께 더욱 잘 해드려야 한다며 심지어 저희도 평소에 잘 안 사먹는 호텔 베이커리의 고급 빵까지 나눠주세요. 가장 맛있고 좋은 것을 베풀고 싶으셔서 그러세요. 그런 어머니가 대단하고 감사하면서도 일은 일이니까, 저는 점심 말고 차라리 아침을 해주시라고 간곡히 말씀 드립니다.”

이렇게 지극정성인 어머니가 권 대표에게는 오죽 잘했을까 상상이 된다. 권 대표가 중학생 때 4시간 동안이나 쉬지 않고 치러야 했던 시험에서 어머니는 시험시간 내내 염주를 돌리며 기도했고, 유학생활 내내 딸이 하는 공부와 관련된 모든 신문 스크랩을 모아 우편으로 보냈다. 거기에 따뜻한 메시지가 담긴 편지와 낙엽을 한 장 더해서 말이다. 권 대표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미국 휴스턴, 호주, 보스톤에서 쭉 외국생활을 했는데도 한국의 따듯한 정 문화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어머니 덕분이다.

 

“어머니를 보고 자랐기 때문에 제가 어머니처럼 나이가 들 것을 의심치 않아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과 같은 염색체를 갖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뿌듯해요. 부모님의 이런 좋은 점을 닮은 것도 행복한데 부족한 저를 아껴주시고 지지해주셔서 말할 수 없을 만큼 감사드립니다. 어머니는 사무실에서 인기투표를 해도 늘 1등으로 뽑히세요. 단순히 책상을 닦아 주시고 요리를 해주시는 것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항상 기도해 주시고, 절에 등도 달아주시는데 그런 진심이 통하는 것 같아요.”

그녀는 어머니를 자신의 ‘미래’라고 생각한다. 딸 셋 중에 가장 어머니를 닮아서도 그렇지만 어머니처럼 살고 싶어서다. 이들은 모녀지간을 넘어 서로를 존경하고 존중하는 사이였다.

여기 이들을 표현하기 좋은 말이 있다. ‘나물’. 권 대표가 제사 때마다 맡아오고 있는 나물 무침은 “야채마다 갖고 있는 고유한 향을 살리는 게 관건이기에 마늘은 절대 넣지 말아야 하고, 굵은 소금과 깨소금, 그리고 좋은 참기름만으로 간을 해야 한다”고 한다. 그렇게 나물의 향취를 살리는 것이 포인트, 이들도 서로의 향을 ‘지키고’ ‘돋우고’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던가. 서로를 깔끔하게 다듬고 거친 면을 부드러운 질감으로 바꾸기 위해 살짝 데치기도 하면서 꼭 필요한 좋은 양념만 더해주는 모습, 권소연 대표와 그녀의 어머니를 닮았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작권자 © 리더피아(Leaderpia)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